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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Nice & Fun 2019. 9. 11. 16:25

라면은 1963년 9월 15일 태어났습니다. 모두들 힘들게 살던 시절,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어느 날, 삼양식품 전중윤 사장은 남대문시장을 지나다가 배고픈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하는 꿀꿀이죽을 사먹으려고 길게 줄을 선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 사람들에게 싼 음식을 배부르게 먹게 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 끝에 일본에서 라면을 제조하는 기술을 들여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라에는 외화가 부족하고 일본과는 국교가 없는 상황에서 라면 제조설비를 들여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민간은 정부보유 달러를 마음대로 살 수 없었던 때였습니다. 더구나 한 라인에 6만 달러나 하는 제조설비를 개인이 산다는 것은? 궁하면 통한다고. 전 사장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 김종필(JP)부장을 찾아갔습니다. 백성들을 배 곯리지 말자는 전 사장의 호소에, JP는 농림부에서 보유한 10만 달러 중 5만 달러를 전 사장이 쓸 수 있도록 선처해 주었습니다. 신용장을 열었지만 일본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전후라 일본도 어려운 시절인데, 설비를 선뜻 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수소문 끝에 묘조(明星)식품의 오쿠이(奧井) 사장을 만나서 한국의 식량 사정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이야기하고 도와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오쿠이 사장은 “당신 이야기를 듣고 많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한국을 잘 모릅니다. 또한 일본과는 국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본경제를 재건한 것은 고맙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국전쟁 덕분에 잘 살고 있습니다. 라면 제조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설비도 싼 가격으로 드리겠습니다. 한 라인에 6만 달러나 하는 시설을 두 라인에 2만5.000 달러로 주겠다고 헸습니다. 라면에서 면과 수프의 배합비율 사장이 직접 현지에서 라면 제조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일본 기술자들은 면과 수프의 배합 비율만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사장이 허탈해서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 오쿠이 사장은 비서실장을 시켜 공항에서 봉투 하나를 전해 주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뜯어보라는 그 봉투에는 기술자들이 펄펄 뛰며 비밀로 했던 면과 수프의 배합비율이 적혀 있었습니다. 굶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웠던 라면, 처음에는 삼양 ‘치킨라면’이란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가격이 10원, 식당에서 김치나 된장찌개가 30원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고마움을 잊지 않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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